찌라시 언론 기레기 시리즈 [10]: 중앙일보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의 시선] 1988년 서울, 2018년 평양 그리고 '어떤 나라'

내 아이폰 다음 앱 뉴스에 뜬 안혜리 기자의 위 기사를 읽고, 난 그가 논리력 부족하고, 종종 횡설수설하며, 이념적으로도 혼란스러운, 전형적인 조중동 친독재 속물, 50~60 연령대 기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글을 쓰려고 PC에서 원 기사를 찾아보니, 자기 깐엔 잘 나온 걸 골라 올렸을 법한, 이를 환히 드러내고 흐트러진 머리에 좀 어색하게 웃는 사진 모습이 생각보단 한참 젊은이였다. 그 나이에 30~40년 전 독재 시절 세뇌된 사고방식 틀에 갇혀 있다는 게 참으로 이상하고 안타깝다.

안혜리 기자

기사의 요점은 북한 대집단체조를 관람하고 방북 인사들이 보낸 찬사에 트집을 잡아, 결국 남북 정상회담의 성과를 어떻게 해서든지 폄훼하고 싶은 거였다. 그는 최근 서울올림픽 30주년 기념으로 KBS가 방영한 88/18 다큐멘터리에 88 올림픽 때 전두환 대통령 지시로 강제 동원된 학생들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이 불과 30년 전에 개인 인권이 무시되고 억압당하던 시절이 끔찍하다 말하면서, 작금 북한의 상황은 같은 시각으로 보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얼핏 듣거나, 상황인식 능력과 논리력이 부족한 사람에겐 맞는 말인 거 같이 들릴 수도 있다. 이는 "아는 게 힘이다"와 "모르는 게 약이다"를 놓고 개인의 필요에 따라 선택하곤, 그때마다 자기가 택한 것만이 진리인 양 떠드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하고 자기모순이다. 

왜 안 기자의 논지가 완전히 잘못된 것인지 다음 두 가지를 들어 지적한다. 

첫째, 북한의 획일적 학생 강제 동원을 비판하기 위해선, 남한의 과거 같은 행적을 비판적 시각으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꼭 학생 동원이란 좁은 주제가 아니더라도, 과거 독재 정권의 인권탄압과 각종 불법행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쓴 안 기자의 기사가 적어도 그동안 몇 개쯤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아는 한 없다. 그건 정신착란이고, 파렴치한 이중잣대며,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당최 도움이 안 되는 적폐다. 

위에 링크를 단 기사만 보더라도, 안혜리는 전두환 시절 학생 강제동원한 사실을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비판한 사람들을 경솔하다 비꼰다. 그리곤 북한의 학생 동원만 인권유린, 아동학대 운운한다. 난 박정희 명령에 동원되어 지금은 누군지 기억도 나지 않는 외국 지도자 환영하러 학교 수업할 시간에 길거리에 나간 적이 있다. 몇 시간 기다려 각본대로 열광적으로 손 흔들고 고함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안 기자는 당시 남한이 과연 '어떤 나라'였다고 생각하는지가 나는 더 궁금하다. '인권'을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따져 필요할 때만 가려서 사용한다면, 그건 인권을 모독하는 것이고, 차라리 입 다물고 침묵하느니만 못하다. 

안 기자도 직접 경험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우리 세대가 자랄 땐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운동장에서 학교 교장 선생의 훈시를 비롯한 조회를 1시간가량 했다. 날씨 추운 겨울엔 벌벌 떨었고, 더운 여름철이면 예외 없이 1~2명씩 쓰려졌다. 당시 교실마다 인터콤 시스템이 완비되어 있었는데 왜 혹독한 날씨에도 어린 초등학생까지 군대에서 열병식 하듯 밖에서 조회를 해야 했는지 난 지금도 의문이다. 

선생들의 구타와 체벌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니 언급하지 않는다. 지금 기준으론 형사처벌 받을 일이 전국적으로 버젓이 자행되었단 말이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자성 없이, 똑같은 거로 남만 탓하는 인간이 가장 저속한 인간이다. 

둘째, 주변 상황과 역사적 사실을 다 무시하고 북한의 학생을 동원한 대집단체조만 놓고 본다면 당연히 비난해야 할 작태다. 그러나 우린 왜 북한에 문재인 대통령과 수행원들이 갔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똘똘한 초등학생 정도의 지적 수준을 가진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상황에 따라 말을 가려할 줄 안다. 남북이 서로 주적(主敵)인 구도에서 앞으론 평화롭게 형제국처럼 살기 위한 첫걸음을 떼려고 간 거다. 

그런데 "북한 주민 인권을 보장하라", "정치범을 석방하라", "아직도 이밥에 고깃국 못 먹는구나" 같이 입바른 소릴 대놓고 할 거면 굳이 만나서 회담할 이유가 없다. 안 기자가 직장에 불만 있는 거 상사나 사주에게 단 한 번이라도 직설적으로 표현한 적이 있을까? 난 없다고 단언한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해직 기자가 되어 있을 테니까. 

과거 김장수 국방부 장관이 노무현 대통령을 수행하여 북한을 방문했었다. 김정일과 상견례를 하며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경직된 얼굴로 인상 쓰며 악수하는 걸 보고 난 그가 한참 모자란 일차원적 인간이라 장탄식을 했었다. 그러려면 뭐하러 북한에 가나? 가식적으로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인사하기가 그토록 거북하다면, 대통령에게 솔직히 털어놓거나 차라리 핑계라도 대고 남한에 남아있었어야 했다. 

지금 트럼프 미 대통령도 김정일 이름만 나오면 온갖 입에 발린 칭찬을 하곤 한다. 그 이유는 트럼프가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자국의 이익이 걸린 협상을 진행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정치범 모두 석방하라", "북한의 인권문제부터 해결하라"며 초를 친다면 회담이 제대로 될까? 문재인 대통령과 수행원들의 북한에 대한 덕담도 다 그런 차원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건 성장하며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은 사람에겐 상식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안 기자의 가정교육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한번 살펴보자. 

한국언론진흥재단(KPF) 오수정 기자의 인터뷰 기사엔 안 기자에 관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기자 가족 - 2·3대 기자/부모 영향으로 기자직 선택? "글쎄요..." 

한편에선 아버지 덕에 신문사에 들어왔다는 말이 들리기도 한다. 안혜리 기자는 "다른 지원자들과 모든 면에서 점수가 비슷했다면 아버지가 기자라는 것이 플러스가 됐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구설에 2세 기자들은 이미 무뎌졌다. "별로 신경 안 쓰고 내 일에 충실하려 한다."는 것이 안 기자의 말이다. 

쉬운 말로 아버지 청탁 또는 아버지 가산점으로 기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자신도 인정하면서, 그게 뭐 대수냐는 태도다. 한국에선 청탁이 다른 모든 조건이 같을 때 가산점 주는 게 아니라는 거 삼척동자도 다 안다. 안 기자는 합격자 수보다 청탁 건수가 더 많았던 강원랜드 사건이 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할 거다. 왜 수백 명의 합격자 중 청탁 없이 붙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을까? 기사에 인용된 안 기자의 답변을 읽으며, 난 최순실 딸 정유라가 페이스북에 올렸다는 글이 떠올랐다. 

'돈'을 '청탁'으로만 바꾸면 바로 안 기자가 한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있는 우리 부모 가지고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고. 돈(청탁)도 실력이야. 불만이면 종목을 갈아타야지. 남의 욕하기 바쁘니 아무리 다른 거 한들 어디 성공하겠니?" 

지적(知的)으로 딱 정유라 수준인 안혜리가 아버지 청탁으로 취업하여 당시 들러리로 응시했다 떨어진 기자 지망생들에게 지금도 그렇게 떳떳한지 난 알고 싶다. 안혜리는 주위에서 청탁으로 합격했단 말을 많이 들어서 욱하는 마음에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건지, 지금도 박정희, 박근혜 정권을 옹호하고 변명하기 바쁘다. 아마도 자라며 조선일보 기자였던 부모의 영향이 컸으리라. 

안혜리는 어릴 때 아버지 안병훈이 매일 늦은 밤 집에 들어오거나 못 들어왔는데, 그게 자신의 일에 충실해서였고 보기 좋았다고 한다. 그럼 안혜리도 지금 매일 집에 늦게 들어가거나 집에 못 들어가는지 궁금하다. 그게 아니면 기자직에 충실한 게 아니니까. 도대체 얼마나 모자라면 지금 그 나이에도 기자가 집에 안 들어가는 게 일에 충실해서라 믿고 있는 걸까? 모전여전? 

특히 아버지 안병훈은 박정희 시절 청와대 출입 기자로 당시 박근혜랑 테니스도 같이 칠 정도로 친분을 맺었으며,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7인회(강창희, 김기춘, 김용갑, 김용환, 안병훈, 최병렬, 현경대)의 한 사람이다. 한마디로 박정희교 광신자에, 박씨 왕조를 북한의 김씨 왕조 수준으로 숭상하는 친독재 쓰레기 집안이란 말이다. 

중앙일보 논설위원이란 자리가 기본적인 논리력은 물론 상식마저 태부족한 사람이 차지하고 있다는 게 믿기 어렵다. 내가 안혜리라면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기 전 박근혜 시절 발생한 모든 불법, 비윤리적 행위에 대해 유감부터 표명했을 거다. 

부모 잘못 만나 저 지경이라 변명한다면 한편으론 동정심이 가긴 한다.


우리는 기자가족 기사 전문:

우리는 기자가족 - 2.3대 기자 / 부모 영향으로 기자직 선택? "글쎄요..."

348호 : 52-56 

조선일보 사보에는 자사 기자의 가족이 자신의 가족생활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다. 다음은 그 코너에 실린 조선일보 류근일 논설주간의 넷째 아들 류현철 씨(당시 외국어대 3학년)가 쓴 글의 일부이다(사보 98년 12월 24일 자). 

"…중고등학교때, 아버지 때문에 나는 학교 선생님들게 원치 않는 주목을 받곤 했다. '우리 학교에 OOO아들이 있다던데 혹시 니가 아닌가 싶다. 맞니?' '네.' '그럼 공부 좀 더해라.' 뭐 이런 식이었다. 생활기록부를 봤는지 어쨌는지 한 학년 진급할 때마다 여러 선생님들이 나를 지목해 물어 보셨고 이후의 내 학교생활을 주시하겠노라는 말씀들을 하셨다.… 아버지의 지명도 때문에 이러한 피해를 입은 건 나뿐만 아니라 나의 형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이 훗날 밝혀졌다. 하지만 이런 피해들은 그리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던, 은근히 자랑하고픈 경험이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잘 알려진 언론인(특히 방송인이라면 더욱)의 2세는 이런 경험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2세가 부모의 뒤를 이어 기자직에 뛰어들었다면 다시 한번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부모와 자식이 기자인 집안, 과연 '그들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까?' 

3대가 기자가족 

"항상 아버지 이름이 따라다닌다. 취재원을 만날 때마다 아버지 얘기가 나오고 안부를 묻 는다."고 안혜리(중앙일보 문화부, 안병훈 조선일보 부사장의 딸) 기자는 말했다. 

TV출연으로 얼굴이 잘 알려진 봉두완(전 한국일보 기자, 현 광운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아들인 봉화식(중앙일보 영문뉴스팀) 기자는 "아버지가 유명하다는 것 때문에 유치원때부터 남들과 다른 눈초리를 받았다. 학교다닐 때는 왕따도 당해봤다."고 밝혔다. 

한편에선 아버지 덕에 신문사에 들어왔다는 말이 들리기도 한다. 안혜리 기자는 "다른 지원자들과 모든 면에서 점수가 비슷했다면 아버지가 기자라는 것이 플러스가 됐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구설에 2세 기자들은 이미 무뎌졌다. "별로 신경 안 쓰고 내 일에 충실하려 한다."는 것이 안 기자의 말이다. 

안 기자의 집안은 3대를 잇는 기자가족이다. 6·25때 납북된 할아버지(안찬수 씨)는 연합신문 편집부국장, 조선일보 편집부장까지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가 안병훈 조선일보 부사장이며 어머니 박정자 상명여대 사범대학장 역시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다. 

3대가 기자가족인 경우는 또 있다. 대한매일 서동철(문화부) 기자의 아버지는 서울신문(대한매일의 전신) 기자, 감사, 사장 등 주요직책을 맡았던 서기원 씨이고 할아버지는 서울신문의 전신인 매일신보 서내석 기자(작고)였다. 서 기자 가족은 3대가 기자일 뿐 아니라 모두 같은 신문사와 인연을 맺은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3대 기자는 아니지만 곽우신(KBS 경제부) 기자와 선우정(조선일보 경제과학부) 기자 역시 기자가족에서 뺄 수 없다. 곽 기자의 아버지는 곽노환 전 MBC 앵커였고 부인 선재희 씨 역시 KBS 뉴스광장팀 기자다. 또 선우 기자는 조선일보 가족이다. 아버지는 고 선우휘 전 조선일보 주필이고 부인 정재연 씨는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다. 

"아버지 영향 받긴 받았을 것" 

부모가 기자라는 것이 자식이 기자직을 선택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일까? "그간 아버지 영 향을 받았다는 생각은 별로 해보질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초등학교 일기장을 보니 '나도 커서 기자를 해야겠다'는 구절이 제법 눈에 띄었다. 아마 내 속에 잠재적으로 자리잡고 있 었던 것 같다."고 안 기자는 말했다. 

봉화식 기자 역시 "아버지 영향을 받긴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직접적인 기자 직 선택 동기에 대해 "87년 6·29 선언과 88년 올림픽 등으로 언론계가 대학생들에게 각광 받는 직종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88년 말에 입사한 봉 기자는 미국에서 대학 다닐 때 교포유학생을 대상으로 한글과 영어가 섞인 신문의 편집인을 1년간 맡았을 정도로 기자직에 관심이 많았다. 

안병훈 부사장이 기자직을 선택한 것은 "당시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 제대 후 취업을 할만 한 곳이 은행, 신문사 아니면 고시공부였다. 마침 신문사 시험이 있어 기자가 됐지만 아버지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반면 곽우신 기자는 "아버지를 보니 좋은 직업이 아닌 것 같아 기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매일 늦게 들어오고(아버지는 뉴스데스크 앵커였는데 그때만 해도 밤 10시에 시작했다고. 그래서 매일 밤 11시 넘어서야 아들과 상봉) 월급도 적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대학졸업 후 고시공부를 하다 집안 사정상 취직이 급해 시험을 보다보니 방송사 기자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런 말들로 미루어 봐서 부모의 절대적인 영향이 직업을 선택하게 만든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 집에 오는 사람 대부분이 기자였기 때문에 기자생활이 어떤 건지는 알 것 같았다."는 안혜리 기자의 말처럼 이들은 남들보다 '기자'라는 직업을 가까이서 접했고 기자의 세계를 환상없이 알 수 있었다. 

"집안엔 거의 없는 존재" 

안혜리 기자의 어린 눈에 비친 '기자' 아버지는 "집안엔 거의 없는 존재"였다고 한다. 매일 늦은 밤에 들어오시거나 못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또 "취재원으로부터 밤새도록 전화가 와 코드를 아예 빼놓고 산 적도 있었고 기사로 인한 외부 압력 때문에 아버지가 피신한 적도 있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자신의 일에 충실한 모습이 좋았다."고 한다. 

안병훈 부사장은 딸이 기자가 된다고 했을 때 "너가 좋으면 해라."라는 말 외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안 부사장은 "워낙 부녀간 간여하지 않는 편"이라고 말하면서도 "신문사에서 여기자의 위상이 결코 확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편으론 걱정도 됐다."고 밝혔다. 

봉 기자의 경우는 "아버지가 가정적이어서 바쁜 와중에도 가족과 지내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고 말했다. 봉두완 교수는 아들이 기자가 된다고 했을 때 좋아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가업을 잇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봉 기자는 말했다. 이에 대해 봉두완 교수는 "평생 언론직에 종사해온 내 모습을 아들에게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기뻤다."고 밝혔다. 

봉 교수는 "내 그늘이 너무 큰 탓에 아이들이 콤플렉스를 많이 가졌다."면서 "더군다나 '봉'이란 성이 희성이기 때문에 아이들 뒤에 항상 내이름이 따라 다녔다. 그래서 딸아이 는 심지어 학원 다닐 때 성을 바꿔 등록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럼 부모 기자는 자식의 기사에 얼마나 신경쓰고 있을까? 안 기자의 기사평은 주로 어머님 몫이다. "취재가 부족한 점, 편향된 기사 등을 날카롭게 지적한다."고 전했다. 곽우 신 기자의 리포트는 아버지가 모니터한다. "나뿐 아니라 며느리까지 리포트하는 것을 지켜 보며 모니터 해 주신다."고. 

자식이 기자일을 하니 간혹 난처한 입장에 처하기도 한다. 봉 교수의 경우 그가 재직중인 광운대의 부정입학 사건 취재기자가 아들이었고 또 잘 알고 지내던 상지대 김문기 전 이사장이 부동산 투기 및 학교운영 비리 혐의로 구속되기까지 아들이 취재를 맡았다. 

봉 교수는 "무엇보다 기자의 본분을 지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선이다. '정의로운 기자'가 되라는 것이 내 당부였다."고 말했다. 

서동철 기자는 아버지 서기원 씨가 전 서울신문 사장이던 89년 치열한 파업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자가 노사로 갈려 싸우기도 했다. 

부모와 자식이 똑같은 언론계에 종사하지만 그들간에 느끼는 세대차는 없을까? 안혜리 기자는 "아버지는 기자직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셨다. 그러나 나는 기자라는 직업이 내 가정과 자신을 지켜가며 하는 것이지 나를 버려가며 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봉 기자는 "워낙 아버지가 젊은 학생들과 계속 만나고 외국 생활도 하셔서 별다른 세대차를 느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 눈에는 요즘 기자가 예전 기자와는 달라 보인다고 한다. 봉두완 교수는 "지금의 기자는 공사를 잘 구분하는 것 같다. 예전엔 선배 기자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쫓아다녀야 하는 줄 알았는데 요즘엔 자신의 일을 우선적으로 챙긴다. 한편으론 더 정의롭고 깨끗하다는 생각을 한다."고 밝혔다. 

서기원 전 사장은 95년 서울신문 사보와의 인터뷰에서 "어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문을 하신 부친(서내석 씨)은 문장이 좋으셨던지 1920년대 매일신보 기자모집 광고를 보고 써 보낸 글이 뽑혀 고향 홍성에서 상경하셨다. 2차 시험은 덕수궁으로 데리고 가 한바퀴 돌아보고 난 뒤 글을 쓰게 하는 것이었다 한다."고 말했다. 이 또한 지금의 기자채용과정을 생각했을 때 옛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말이다. 

'언론자유의 아름다움' 

안 기자, 봉 기자와는 달리 이자연(조선일보 편집부, 이주혁 전 조선일보 기자, 현 인천방송 사장 딸) 기자는 "태어난 해에 아버지는 이미 해직상태(1974년 조선일보 투위에 가담해 75 년 해직)였기 때문에 기자 집안 분위기를 못 느끼고" 자랐다. 

그러나 이 기자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께 들어온 말이 있다. "네 이름의 '자(自)'자는 '언론자유'의 '자'다. 즉 너의 이름은 '언론자유(自)의 아름다움(姸)'이란 상징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서 기자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이 기자는 대학때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법대생이었다. 그러나 "고시공부를 하다보니 발로 뛰면서 직접 사람을 만나는 것이 넓은 세상을 배우는 데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래서 언론사 시험을 보게 됐는데 IMF 때라 뽑는 신문사가 두 군데 밖에 없었다고 한다. 안혜리 기자의 경우 " 아버지가 일하는 곳에 가면 불편할까봐 다른 언론사를 선택했다."고 하는데 이 기자는 그럴 여지가 없었다. "한편으론 아버지가 뜻을 다 펼치지 못한 곳에서 잘린 가지에 새순으로 다시 돋아 뒤를 잇겠다는 의미도 부여했다."고 한다. 

딸이 기자가 된다고 했을 때 이주혁 사장은 "여성이 기자생활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가정과 직장생활을 양립하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식이 가려는 길을 막을 자격도 없고 그럴 의사도 없었다."고 말했다. 

전직 기자인 아버지는 이제 막 기자생활을 시작한 딸에게(올해 1월 입사) 큰 힘이 된다. "나는 아직 초년병이라 무조건 남들 하는 데로 쫓아가려 한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큰 조직에 있다보면 자신을 잃을 수 있다며 개인의 발전이 조직을 살찌우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정신없이 뒤쫓아가는 내 자신을 가끔씩 되돌아보게 해주신다."고 말했다. 이 기자는 '만약 부모가 기자생활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면 더 능력있는 기자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공감하지 않는다. "남들보다 먼저 고민하고 먼저 준비했던 사람이 앞서가는 것이지 그런 조건은 중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짧은 기자생활 동안에도 부녀기자에게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이 기자는 올 초 사회부에 있을 때 한 관영 단체에서 개최한 부정부패추방 결의대회 취재를 갔다. 단체장을 만나고 나오는데 한 관계자가 자료를 주면서 큰 박스 기사를 부탁하더란다. 회사로 돌아와 자료를 펼쳐 보니 10만원 짜리 돈 봉투가 있었던 것. 

"너무 화가 났다. 다른 것도 아니고 부정부패를 추방하자고 결의대회를 하면서 돈봉투를 돌린다는 것이 곧 시민들을 우롱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기자는 당장 단체 관계자에 전화해 "빨리 안 가져가면 기사를 빼겠다."며 화를 냈다고 한다. 그 전에 이미 기사를 빼기로 결정했음에도. 

그 일이 있은 며칠 뒤 아버지가 전화를 했다. 돈 봉투 때문에 일이 있었느냐고. "알고 보니 단체 관계자가 아버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 일에 대해 이주혁 사장은 "우선은 잘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처리가 너무 미숙했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그렇게 전화로 호통치는 것보다는 직접 가서 조용히 돌려주고 오는 것이 예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자연 기자와 동기인 백강영(국제부) 기자 역시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백기범 전 기자의 아들이다. 

"혼자서 독자노선 걷는다" 

2세 기자로 알려진 경우는 이외에도 경향신문 이진구(사회부, 이성호 전 논설위원의 아들) 기자, 국민일보 고세욱(종교부, MBC 고진 보도본부장의 아들) 기자, 문화일보 김구철(사진부, 김천길 전 AP통신 기자의 아들) 기자, 조선일보 최장원(사회부, 고 최석채 주필의 아들) 기자, 중앙일보 남정호(체육부, 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의 아들) 기자 그리고 SBS 최희준(보도본부, 최병렬 전 조선일보 편집국장의 아들) 기자 등이 있다. 그외 기자협회보 김일 기자는 김중배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현 언론개혁시민연대 상임대표)의 아들이다. 

예전에 KBS 어린이집에 취재 가서 들은 얘기 하나. "여기 아이들은 다른 어린이집 아이들과 노는 게 달라요."라며 원장이 말했다. "매일 TV에 나오는 부모님을 봐서 그런지 아나운서 놀이, 기자놀이 하면서 마이크 잡고 말하는 흉내를 내요." 이는 아이들이 부모 직업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일례였다. 

그러나 대한매일 8월 2일자 '외언내언' 코너의 '아버지와 아들'이란 글에 나온 부자를 보면 자식의 부모 흉내내기는 성인이 돼서까지 계속되진 않는 것 같다. "아프리카 콩고에는 혈육상잔을 벌이는 부자가 있다. 아버지 사올라나 벰바는 정부의 장관이고 아들 장 피에르 벰바는 밀림 속에서 반정부 투쟁을 벌이고 있는 반군 지도자다. 

또 우리나라에도 번역본이 나온 프랑스 베스트셀러 '승려와 철학자'는 20년간 서로 소식을 끊고 살았던 부자가 다시 만나 종교 토론을 벌인 내용을 담고 있다. 아버지 장 프랑수아 르벨은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언론인이고 과학자였던 아들 마티유 리카르는 27세 때 티베트로 날아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 

2세 기자들은 부모가 저명 언론인이었기 때문에 드리워졌던 그늘에서 이미 벗어난 사람들이다. 대한매일 서동철 (문화부) 기자가 "나는 그저 혼자서 독자노선을 걷고 있다."고 말하고 있듯이 이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일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자가족'에 남다른 관심이 있다면 이런 감동을 느끼고 싶은 때문은 아닐까?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인 이길용 전 동아일보 기자와 그의 아들 이태영 전 중앙경제신문 국장은 대표적인 부자기자이다. '신문과 방송' 90년 9월호에 실린 '체육기자 이길용' 기사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이태영 씨(중앙경제신문 국장대우 체육부장)는 1961년 이관구 편협 명예회장(당시 경향신문 주필)의 권고로 경향신문에 입사, 부친의 뒤를 이어 30년간 체육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이태영 씨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 양정모 선수가 손기정 선수에 이어 우리나라 선수로는 두 번째로 올림픽 우승의 영광을 차지하는 순간을 취재기자로서 손기정 씨와 함께 지켜보았다. 손기정 씨는 '내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할 당시 부친께서 나를 도와주셨는데 40년만에 양정모 선수가 내 뒤를 이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거는 감격스런 모습을 그의 아들인 이 기자와 함께 지켜보니 감개무량하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오수정 기자 shinbang@kp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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